조선 주요인물 나무위키


기러기는 한번 짝을 지으면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사는 금슬 좋은 새이지요. 그래서 신랑은 기러기 한 쌍을 주며 사이좋은 부부로 한평생 살아가자는 마음을 신부에게 전했던 거예요. 여러분이 앞으로 커서 성년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면,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깨닫고 사회인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관례를 치르는 소년은 먼저 어른이 평상시에 입는 옷으로 갈아입어요.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이 남자아이의 댕기머리를 풀어 상투를 틀고 망건을 씌워 주며, 축하의 말을 하지요. 이것이 끝나면 어른의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갓을 머리에 쓰는 예식을 해요.


결국 집행지까지 가서야 망나니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미 신각은 처형당한 뒤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각의 죽음을 보고 정부의 무능함을 꼬집어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실시하던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해 온 쌍기를 통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책도 연산군 때 임사홍(任士洪) 등이 다시 수정하고, 1530년(중종 25년) 이행(李荇) 등이 누락된 것을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55권)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이 지도는 지금 남아 있는 세계지도 중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위 세계지도에 들어 있는 한국 지도는 이회가 제작한 것인데, 한반도의 모습이 현대지도를 보는 것처럼 비교적 정확하다.


하긴 조선시대 그려진 그림이 적지 않지만 풍속화만큼 친근하고 감동을 주는 그림도 많지 않죠. 그건 아마도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그린 그림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풍속화를 통해 조선 후기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섬세하고 여성적인 필치로 다양한 소재를(꽃과 나비, 벌,오리,풀벌레등) 그려 여성화가로서 교본이 됩니다. 가지와 방아깨비는 아담하게 열린 가지를 중심으로 개미와 방아깨비, 벌과 나비나 나방이 각각의 위치에서 멋진 균형을 유지하고있습니다. 단순한 구도지만 소재의 다양함의 조화가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농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반란을 지향하던 심성을 나타내 준다. 그리하여 홍경래난이 평정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농민의 저항운동은 다시금 일어났고,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철종 13년(1862)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한 ‘1862년 농민항쟁’으로 불리는 투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민중운동을 대표하는 것은 民亂과 變亂을 들 수 있다. 민란 혹은 民擾라 할 때는 향촌사회에 뿌리를 두고 그 속에서 생산활동을 하며 생활하던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한 부세수탈이나 수령과 이서배의 수탈에 대항하여 通文을 돌리거나 呈訴를 거쳐 봉기하는 것을 말한다.


음행녀 명부인 「자녀안」이나 「유녀적」에 이름이 기재되어 평생 간음녀로 낙인찍히거나 관비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자들의 간통은 결혼 이전에는 파혼의 사유가 되었고, 결혼 이후에는 이혼의 사유가 되었다. 반면 남자들은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에만 이혼 대상이 되었다. 부부간의 애정보다도 도의를 중시한 삼불거는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철저히 이행되었다. 칠거지악은 사실 우리나라의 이혼 풍속이 아닌 중국의 풍속이었다.


이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는 고종시대사를 다시 편찬하고 있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여 통신사를 파견해 오고 있었으나, 매우 경계하였다. 일본 역시 18세기 후반에 들어 대기근과 폭동이 일어나는 등 내정이 어지러웠고 막부의 재정이 어려워져 오랫동안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정조 시기에는 한 차례도 통신사 왕래가 없었고, 마지막 통신사가 파견된 것은 1811년(순조 11년)의 일이다.


이들 가족이 몰락한 양반인지, 아니면 부유한 서민 가족인지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반만 쓰는 사방관을 쓴 모습이나 어머니의 옷매무새를 보면 서민 가족이라기보다는 몰락한 양반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만약 부유한 서민이었다면 돗자리를 짜거나 물레를 돌려가며 바쁘게 살아가지는 않지 않았을까요? 자세한 사연은 알기 어렵지만 공부에 열중하는 아들의 글읽는 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부부는 몸은 비록 고되더라도 마음 한편은 뿌듯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을 함빡 머금고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과 웃음과 마름의 흐트러진 자세를 통해서 계급간의 불공평한 관계를 극화시켜 표현하였다. 사대부 화가들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18세기 후반 직업 화가인 화원들에 와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된다. 화원은 신분의 성격상 사대부 화가에 비하여 표현의 제약이 적어지고 무엇보다도 백성의 정서적 색채를 짙게 표현하는 데 유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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